위사진은 1924년 5월17일 18일 노량진에서 열린
교외 음악대회에서 윤심덕님(원안)과 연악회원의 현악합주
모습으로 5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이고 아래는 1924년
11월 14일홍난파님과 윤심덕님이 출연해서
성황을 이룬 자선음악회 모습입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정식으로
전파를 내 보내면서 방송에 홍난파의 음악이 실리고
전수린님이 곡을 부친 대중가요가 전파를 탔습니다. 녹음을
할 수 없던 시절에 생방송도 있었지만 레코드를 통한
방송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수린님을 비롯한
손목인, 김해송, 박시춘, 이만식, 김교성, 김기현,
이재호님등이 작곡과 함께 방송에 힘을 기울였고
이 애리수님, 이난영님과 왕수복님, 고복수님등이
혜성같이 나타나 대중가요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난영님은 널리 알려져 있고 제 불로그에도
글이 올라 있지만 왕수복님은 월북가수여서 그에 관한
얘기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평양기생 왕수복님은
당대 최대의 대중가요 가수로 1933년 17살 때 님이 부른
레코드가 120만장이 팔릴 정도로 선풍적인
비록 가정이 어려워 기생을 했지만
일본유학을 거쳐 교양을 갖춘 지성인이었습니다.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한창 인기가 높았을 때
삼천리지 주최로 10대가수를 선정했습니다.
이때 이난영님을 뒤로 밀어내고 10대가수의
첫 번째 명단에 오른 사람이 왕수복님이었고 경성방송국에
초대해서 아리랑을 불러 일본 전역을 향해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와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춘원이 일찍이 세상을 떠남에
노천명의 약혼자이기도 한 김광진과 결혼해서 노천명을
처녀로 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김광진과 함께 월북해서 활약했고
김일성과 김정일 대를 이어 최대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공훈배우가 되고 2003년 83세로 세상을 떠 북한의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자세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평양기생 선우일선(鮮于 一扇) 또한
그 시대 명가수였고 아리랑 등에 출연한 명 배우였습니다.
님이 부른 조선팔경은 해방되고 대한팔경이라는 곡명으로
황금심, 박재란님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황성옛터,
능수버들, 목포의 눈물, 아리랑, 대한팔경,
아주가리 선창, 봄노래, 눈물의 해협,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순풍에 돛을 달고, 봄이 왔네, 안개 낀 섬, 부령청진,
타향살이, 번지 없는 주막 등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또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주던 그 노래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왕수복, 이난영, 김선초, 복혜숙, 김선영, 선우일선, 이 애리수, 김용환
( 김정구의 형 ), 채규엽, 강홍식, 전옥, ( 두분은 부부이고 강효실님은
그의 딸임 ) 고복수, 최남용, 강석연, 남인수, 김정구, 차홍련,
진방남. 백년설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원한
명가수들이 부른 대중가요였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부른 노래들을 접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감동을 느낍니다. 그 중에
몇 곡은 제 불로그에도 올려놓았고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올립니다.
우리말 전담방송을 하게 된 1주년이 되는 날
1934년 4월 26일에는 이중방송 개시 1주년을 기념해서
JODK악단의 반주로 강홍식, 전옥부부가 부른 우리 가요를
일본 전국에 중계 방송했고 그해 11월에는 김추월님의
새 가요 마의 태자가 전 일본에 중계방송 되었습니다.
1935년에는 제 2 방송에서 모집한
신민요 당선가요를 이난영님의 노래로 전 일본에
중계방송 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 194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가요계는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