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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음악의 발원과 경성방송국

이장춘 2009. 11. 2. 04:54

 

 

   
 이 땅에 영화가 들어오고, 현대음악이
들어오고 곧이어 1927년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었습니다. 
구한말 박정양대감의 아들 박승희님이 이끄는 토월회를 주축으로
신 연극이 들어오고 경성방송국의 초대 우리말 방송과장을 지내신
윤백남등이 주축이 되어  영화가 들어 왔습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최승희님의 무용과 홍난파님을 통한 현대음악의 문이 열리고
천재음악가 윤심덕에 의해서 현대음악이 전파되었습니다.
윤심덕님이 부른 그때 그 음악 사의 찬미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와 함께 윤심덕님은
 30세를 일기로 가셨습니다.


한국 현대음악의 발원과 경성방송국





바로 이때 1924년 12월을 기해서
이 땅에서시험방송이 실시되며 현대음악과
 현대 연극이 방송전파에실렸습니다.  제 불로그
 다른 곳에 얘기를 올려놓았음으로 현대음악이 노래로
불려지던 얘기만 하겠습니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에는  국악이라고 부르는 시조, 가사, 판소리, 창 등이 불려
 왔습니다. 1920년대에 이르면서 윤심덕이라는 천재 성악가의
출현은 현대음악에 관심이 증폭되었고 시험전파이기는
했어도 방송전파를 타면서 새롭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때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새로운 음악에
대해많은 지면을 할애 했습니다.  윤심덕이 출연하는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방송전파와 함께 신문,
 잡지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윤심덕은 당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사의 찬미노래처럼 현해탄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때가
 1926년 윤심덕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또  그 뒤에 유럽에서 윤심덕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어 그의  생사에 관해서는 두고두고
미스레리로 남아서 그  의 명성만큼이나
큰 화재거리였습니다.




위사진은 1924년 5월17일 18일 노량진에서 열린
교외 음악대회에서 윤심덕님(원안)과 연악회원의 현악합주
 모습으로 5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이고 아래는 1924년
11월 14일홍난파님과 윤심덕님이 출연해서
성황을 이룬  자선음악회 모습입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정식으로
전파를 내 보내면서 방송에 홍난파의 음악이 실리고
전수린님이 곡을 부친 대중가요가 전파를 탔습니다. 녹음을
할 수 없던 시절에 생방송도 있었지만 레코드를 통한
방송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수린님을 비롯한
손목인, 김해송, 박시춘, 이만식, 김교성, 김기현,
이재호님등이 작곡과 함께 방송에 힘을 기울였고
이 애리수님, 이난영님과 왕수복님, 고복수님등이
 혜성같이 나타나 대중가요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난영님은 널리 알려져 있고 제 불로그에도
 글이 올라 있지만 왕수복님은 월북가수여서 그에 관한
얘기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평양기생 왕수복님은
 당대 최대의 대중가요 가수로 1933년 17살 때 님이 부른
 레코드가 120만장이 팔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비록 가정이 어려워 기생을 했지만
일본유학을 거쳐 교양을 갖춘 지성인이었습니다.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한창 인기가 높았을 때
삼천리지 주최로 10대가수를 선정했습니다.
 
이때 이난영님을 뒤로 밀어내고 10대가수의
첫 번째 명단에 오른 사람이 왕수복님이었고 경성방송국에
초대해서 아리랑을 불러 일본 전역을 향해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와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춘원이 일찍이 세상을 떠남에
노천명의 약혼자이기도 한 김광진과 결혼해서 노천명을
처녀로 살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김광진과 함께 월북해서 활약했고
김일성과 김정일 대를 이어 최대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공훈배우가 되고 2003년 83세로 세상을 떠 북한의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자세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평양기생 선우일선(鮮于 一扇) 또한
그 시대 명가수였고 아리랑 등에 출연한 명 배우였습니다. 
 님이 부른 조선팔경은 해방되고 대한팔경이라는 곡명으로
황금심, 박재란님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황성옛터,
능수버들, 목포의 눈물, 아리랑, 대한팔경,
아주가리 선창, 봄노래, 눈물의 해협,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순풍에 돛을 달고, 봄이 왔네, 안개 낀 섬, 부령청진,
타향살이, 번지 없는 주막 등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또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주던 그 노래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왕수복, 이난영, 김선초, 복혜숙, 김선영, 선우일선, 이 애리수, 김용환
( 김정구의 형 ), 채규엽, 강홍식, 전옥, ( 두분은 부부이고 강효실님은
 그의 딸임 ) 고복수, 최남용, 강석연,  남인수, 김정구, 차홍련,
진방남. 백년설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원한
명가수들이 부른 대중가요였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부른 노래들을 접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감동을 느낍니다. 그 중에
 몇 곡은 제 불로그에도 올려놓았고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올립니다.
  

  
우리말 전담방송을 하게 된 1주년이 되는 날
1934년 4월 26일에는 이중방송 개시 1주년을 기념해서
JODK악단의 반주로 강홍식, 전옥부부가 부른 우리 가요를
일본 전국에 중계 방송했고 그해 11월에는 김추월님의
새 가요 마의 태자가 전 일본에 중계방송 되었습니다. 

 

 

 
 1935년에는 제 2 방송에서 모집한
신민요 당선가요를 이난영님의 노래로 전 일본에
 중계방송 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 194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가요계는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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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황성옛터 빅터원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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