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에는 임시정부라면 상해외에는
잘 몰랐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해외에서
실시하는 단파방송을 통해 국내 독립운동의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분들이 어디서 어떻게 방송을 했는지
알아보다가 해외 독립운동에 관한 실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독립기념관을 갔습니다.
오늘은 해방 될때까지 임시정부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를 알아보고 다음시간에는
방송실시에 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창설된 후
1945년 독립을 맞아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에 돌아
올 때까지 26년이 넘는 세월 수시로 그 근거지를 옮기면서
숱한 시련 속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다음달 1919년 4월10일과
11일 이틀동안 각 도 대표 자격으로 항일지사 30명이
모여 임시 의정원을 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 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그해 8월 18일부터 열린 제 6 차 임시회의 폐회 기념
사진으로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에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외무총장 박용만,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총판
안창호로 하는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의 주요 사진기록들을 골라 알기 쉽게
정리 해 보았습니다. 잘 아시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에
이곳에서 결성되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활동이
어려워지게 될 때까지 13년간을 머물러 임시정부
활동기간 26년중 반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상해가 임시정부 출발지고 오래 머물러서
상해 임시정부는 우리에게 익숙해졌고 또 그곳을
찾으면 상해 임시정부 옛터를 찼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거에 따라 이곳에서
더 이상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배를 타고 찾은 곳이
항저우 이고 여기서 3년 6개월을 머물렀습니다.
항저우에서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다시
그 눈길을 피해 자싱에서 활동했고 하이옌이라는
피난처를 마련해서 활동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길에 올라 잠시 전장에 머물렀습니다.
일본의 군화발이 내륙으로 까지 미쳐
창사와 광저우를 거쳐 유저우에 이른 것은
1938년이었습니다.
유저우를 떠나 잠시 머무른 곳이 치장입니다.
이곳 치장도 안전지대가 아니어서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비교적 안전지대로 중국 정부가
머무르게 된 우리가 흔히 중경이라고 부르는 충칭에서 짐을 풀고
해방되어 조국 땅에 돌아 올 때까지 5년여 기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2차 대전을 맞고 중국정부와 협력을
강화 했습니다. 광복군을 정식으로 결성하고 훈련을
실시해서 전투에 나섰으며 중국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우리말 단파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동포들, 광복군들, 그리고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국내에서도 들었습니다.
2차 대전의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기고 일본이 패하고
한국이 독립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은 이 단파방송의
영향이 컸습니다. 해방되던 날 조선방송협회 일본인 서무과장이
말하기를 “연합군 비행기가 폭격을 해도 조선옷을 입고 있으면
산다는 소문이 있어, 믿지 않았으나 현실로 다가 왔다” 고
했고 이 소문의 근원지는 중경단파 방송이었습니다.
나라 잃고 타국 땅에서 갖은것 없었고
힘이 모자랐지만 온갖 시련을 넘고 넘어 독립의
결실을 보았습니다. 이제 지난날을 기리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옛날 설움 받으면서, 숨죽이면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 유적지도 복원되어 후세의 국민들이 그곳을
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