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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6-KBS 순직방송인 1호 이성실(기술)

1. 이성실과 묘비 문2. 장례식 추도 장면(중앙방송국장 노창성)3. KBS 동료 직원들 묘소참배(사망 1년 후)4. 이성실 마지막 모습(1951년 3월 10일, 제주방송국 500W 출력증강 송신기 설치) 「마지막 1초까지 나리위해 바친 / 순직청년 李成實이 여기 누었다.송신기를 고치던 손이 감전돼 / 스물 세살이 꽃봉오리 모양 꺾였다.자유의 소리 大韓과 함께 영원히 있을 그대 / 동지들의 꽃다발을 안고 고이 쉬시라. 」 단기 四二八五년 칠월 일동료직원이자 시인 노천명의 글로 새겨진 이성실의 묘비 글이다. 당시 이성실의 부산일보 訃告 원문을 옮긴다. 本局 局員 李成實技士는 단기 4284년 7월 29일 오후 6시 15분 순직하였기에 玆以訃告공보처 방송국장 盧昌成, -중략- 장지 釜山市 共同墓地/葬儀위원장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5, KBS 사우회 35년 걸어온 길

1.동우회 해산·사우회 창립총회 (1888년 12월 19일, 회장 최창봉)2.창립총회를 마치고 본사방문(원안 : 임원진 이인관·최창봉·노정팔 KBS이사장·조돈준·김성배) 3.2005년 8월 수원 연수원에서 컴퓨터 교실을 마치고(1회 20명씩 3회 시행되었다.)4.강원도 정선 문화재 탐방·탐석여행 2006년 5월(창립 기념일을 앞두고 많은 회원참석)5.처음 열린 사우회 창립일 기념행사(2006년 6월 1일)6. 사우회 30주년 기념식장(2019년)7.여성위원회 창립(2015년 9월 18일) 2006년 6월 1일, KBS 사우회가 법적으로 탄생한지 17년이 되어 첫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오늘, 창립 35회를 맞아 3,000여 회원을 거느린 언론사 퇴직사원 최대 결사체가 되었다. 19..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4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

2024년 3월 29일 역사적인 KBS교향악단 800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이 교향악단은 90년을 거슬러 올라가 홍난파가 주축이 되어 1935년 4월 13일 JODK오케스트라 결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전에도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악단이 있었지만 실내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JODK오케스트라를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30명 내외의 단원으로 방송국의 양악은 이때부터 그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1941년 홍난파가 세상을 뜨면서 계정식이 지휘를 맡고 악장으로 있던 김생려가 운영을 맡았지만 곧이어 제2차 대전이 일어나, 교향악단은 망가지고 관현악단 수준으로 운영되다가 해방되면서 아예 해체되고 민간이 운영하는 고려교향악단이 탄생했다. 이 악단은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0월 24일,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3,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누가 잘하나 70년

KBS-2TV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면 어린이들의 발랄한 동작·동요와 함께 사회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1954년 시작된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어린이 전문 음악 프로그램동요와 함께 끼와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어린이들의 '꿈의 무대'로 동요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추억의 동요 명곡부터 교과서 수록곡, 최신 동요까지 세상의 모든 동요를 소개하고, 함께 부른다. 또한 클래식, 국악, 뮤지컬, 팝 등 다양한 장르의 고품격 음악과 공연을 소개해 어린이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음악 전반에 대한 이해를 북돋운다.」KBS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이번에는 .....!」하고, 사회자의 말이 시작되면 모두가 앞 다투어 손을 들며 저요, 저요. 를 외친다. 지명 받은 어린이는 혼신을 다..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2女路, 방송사상 최고의 시청률·화제작

1.영구·분이 결혼식 장면 O안 작가·연출 이남섭 (제공 고 김연진)2.영구(장욱제) 분이(태현실)의 극중 인물과 실제인물(제공 고 정규봉)3.여로 終放 기념 (제공 오승룡) 본명 장시권 張時權  1972년4월 3일부터 12월, 7시 반부터 50분까지, 일일연속극 211회가 방영되면서 온통 화제는 여로에 모아졌다. TV가 있는 집, 전파사, 다방, 만홧가게 등 TV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그 시간대면 시가지가 한산 할 정도였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70%가 여로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작품의 제목을 딴 상품과 상호가 생겨났고, 남자 주인공 ‘영구’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영구의 뛰어난 연기력에 분이의 일제 강점기로부터 5. 16후까지 20년간 격동기..

음악평론가 이상만·윤희여사·시인 윤동주

위 사진 이상만 선생님 부인이자 윤동주 시인의 사촌 윤희여사님은 우리세대 홈인테리어 선구자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셨습니다. 70년 대 초 진양아파트 1층에 점포를 열자 신세대 젊은 주부들이 많이 들, 와 새로운 디자인에 수툴(stool - 등받이가없는보조의자)을 마련하였답니다.  윤희여사는 이 수툴을 동그랗고 작게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우리의 응접실 문화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돌아가신 문 복순 선배님 윤 여사 그리고 나 모두 진양아파트에 같은 이웃이었습니다. 윤희여사님은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했습니다. 참으로 재주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이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으로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닭장 같고 답답하다. 했지만 그 당시 30대 후반부..

기본 202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