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6-KBS 순직방송인 1호 이성실(기술)

이장춘 2024. 6. 16. 12:26

 

1. 이성실과 묘비 문

2. 장례식 추도 장면(중앙방송국장 노창성)

3. KBS 동료 직원들 묘소참배(사망 1년 후)

4. 이성실 마지막 모습(1951년 3월 10일, 제주방송국 500W 출력증강 송신기 설치)

 

「마지막 1초까지 나리위해 바친 / 순직청년 李成實이 여기 누었다.

송신기를 고치던 손이 감전돼 / 스물 세살이 꽃봉오리 모양 꺾였다.

자유의 소리 大韓과 함께 영원히 있을 그대 / 동지들의 꽃다발을 안고 고이 쉬시라. 」

단기 四二八五년 칠월 일

동료직원이자 시인 노천명의 글로 새겨진 이성실의 묘비 글이다.

당시 이성실의 부산일보 訃告 원문을 옮긴다.

本局 局員 李成實技士는 단기 4284년 7월 29일 오후 6시 15분 순직하였기에 玆以訃告

공보처 방송국장 盧昌成, -중략- 장지 釜山市 共同墓地/葬儀위원장 李哲源(공보처장)/부위원장 李軒求/ 집행위원장 盧昌成/ 위원 李健赫 金昌朝 李載坤 宋永浩......,主禮 盧震현 牧師

1947년 이리 공업고등학교 학생신분으로 이리방송국 엔지니어가 된 이성실,

1948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입학하면서 중앙방송국 연희송신소로 옮기고

1949년 방송용 송신기를 최초로 제작성공, 격찬을 받으면서 고속승진 대학생 신분으로 技士(4급 갑류 공무원)에 임명될 만큼 특출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중앙방송국 연주소 직원들이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으나 연희송신소에서는 행진곡이 송출되었다.

그날 밤 피난길에 올랐던 박경환은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 아침 7시경 안양에서 라디오를 틀어 보았는데 KBS채널에서 행진곡이 흘러 내와 영문을 몰랐다.」 고 님이 쓴 전쟁일기에 기록되어있다. 뒷날 송신소 이성실이 행진곡을 틀어 방송을 하고 9시경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음이 밝혀졌다.

부산 피난길에서 그해 8월 7일 제주방송국 설립요원으로 선발되어 완공 후 부산중앙방송국으로 복귀 전국 비상방송망을 구축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1·4 후퇴로 다시 부산을 찾은 이성실은 제주방송국 출력증강, 전국방송링크용 단파 송신기 설치 등에 임하다가 감천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KBS 창립 이래 최초의 순직직원이 되었다. 감전사고로 세상을 떠 짧은 생 · 파란만장한 삶을 순직이라는 영예로움으로 세상을 마쳤지만 정작 세월이 지나면서 잊히고 국가유공자 대우도 받지 못한 체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