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부호 HL과 방송의 날 KBS생방송, 방송역사, 기획, 최영 프로듀서, 진행 태의경 아나운서
59회 방송의 날을 맞아 9월 3일 방송한 내용을 글로 옮겼습니다.
그날의 방송내용은 아래 동영상에 있습니다.
KBS 1라디오 “생방송 주말저녁입니다”
출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022년 9월 3일 토요일 저녁 19:05 ~ 19:40(약 35분간)
- KBS 본관 4층 1라디오 생방 스튜디오
- 담당 최 영 PD
만나고 싶었습니다 signal + HLKA 호출부호(O.L)
Opening. 지금 저희 KBS 방송국 호출부호 <HLKA>와 <시각고지>를 들으셨습니다. 오늘 9월 3일 방송의 날은 이 호출부호 <HLKA>를 받은 날을 기념하여 정해진 날이라고 합니다. 도움말씀 주시기 위해, 한국 방송자료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이버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역사>를 운영하고 계시는 이 장춘 선생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1. 먼저 호출부호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호출부호>란 무엇입니까
국제적으로 인정된 방송국 이름입니다.
방금 나온 HLKA에서 HL이 우리나라 방송국을 상징하는 부호로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모든 방송국이 사용하도록 되어있고 방송허가가 나올 때 함께 부여됩니다. 이 호출부호가 없는 방송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되지 않아요. KA는 KBS 제1L 라디오를 상징하는 부호이고요. 채널이 승인 날 때마다 붙어서 한 방송국에도 여러 개의 호출부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옛 날 KBS남산시절에는 세 개의 방송국에서 네 개의 호출부호가 사용되었어요. 서울 중앙방송국 제1방송 HLKA, 제2방송 HLCA, 서울국제방송국 HLSA, 서울 텔레비전방송국 HLCK, 부를 때는 HL을 빼고 KA, CA, SA, CK로 부르면 통했습니다. 기독교방송은 KY로 통했지요. ‘CBS 기독교방송’이라고 하는 것 보다 KY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요.
2. 그러면 우리나라는 언제 이 호출부호를 받았나요?
1947년 9월 미국 애틀랜타 시에서 열린 國際無線通信會議-ITU에서 받았습니다.
그때는 군정시절이어서 군정청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했지요.
3.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의 호출부호로 방송을 했겠군요? 일제 때 호출부호 관련얘기도 해주세요?
그때는 「JODK」라고 했습니다. JO는 일본을 상징하는 호출부호이고 DK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방송국을 의미 합니다. 일본에 먼저 세워진 도오꾜오, 오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로 세워진 방송국이지요. 일본은 JO를 본토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호출부호를 사용해야 된다고 했지만 우리방송인들의 주장으로 JO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만이나 만주에 설치된 방송국에는 JO가 아닌 호출부호가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방방송국에는 「JB00」가 사용되었습니다.
4.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호출부호를 받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방송주권을 찾은 날이지요.
5. 1945년 광복이후 미 군정시절에는 어떤 호출부호와 콜 사인을 사용했나요?
해방되던 다음날 京城放送局 현판은 그대로 둔 체 우리방송인들이 「Seoul Radio station」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어요.
서울 라디오 방송국이라는 국명이 처음 사용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9월 9일 오후 5시 이전까지 제1방송에서 우리말 뉴스가 나가기 전까지는 일본 호출부호가 방송되었어요. 그때 우리말방송을 하면서 호출부호는 어찌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곧이어 9월 중순 미군이 방송국을 접수하면서 미 군정청 소속이 되었어요. 접수과정에서 하루 동안 방송이 중단되었는데 방송국이 문을 연이래 방송이 중단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간은 음악 등을 내보내며 별 내용 없는 방송을 내 보내다가 10월 10일경부터 정상방송을 내 보냈는데 이때부터 미국식 긴 Call Sign이 사용되었어요. 태 아나운서께서 그때 콜 사인을 넣는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해 보셔요.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n Broadcasting Seoul Korea」
6.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는 어떻습니까?
KBS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1973년 공사가 발족 된 뒤부터 사용했다는 분도 계시고 어제 방송의 날 행사에서 후배 현직 직원을 만나 요즈음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KBS 창립 50주년」 기념 준비를 한다고 해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KBS 공사창립 50주년」이라고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더니 무의식중에 그리된다며 주의하겠다고 하더군요.
해방 직후 군정청 시절부터 Korean Broadcasting Seoul, Korean Broadcasting Station, Korean Broadcasting System 등 사용되는 단어는 달랐을지라도 이니셜 KBS는 해방 직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공사될 때 정관에 한국방송공사의 영문자는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 로 명문화 했습니다.
공사되기 전에도 「KBS 여기는 자유의 소리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Seoul Korea HLKA」
「KBS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국제방송국 대공방송에서는 「KBS 여기는 서울입니다. HLSA」
해외방송에서는「KBS 여기는 서울에서 방송 해 드리는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입니다. HLSA」
이것을 해당국어로 방송 한 것 같은데 정확한 철자는 잘 모르겠어요.
- 당시 방송국은 어디 있었나요?
방송국청사 변천과정을 얘기 하는 것이 좋겠군요.
1927년 2월 16일 오후 한 시! JODK 경성방송국 정규방송의 첫 전파가 발사 되었던 곳 정동 1번지! 그 마루턱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때 정동 방송국은 숱한 화재를 낳으며 방송역사에 첫걸음을 내 딛었던 곳입니다. 이곳이 KBS 전신인 JODK 경성방송국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사랑하는 계비 강 씨 신덕왕후가 세상을 뜨자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곳, 이곳에 능을 조성해서 정능이 되었던 장소입니다. 그 능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해체되었지만요. 이곳은 서울 전역이 내려 다 보이는 곳으로 방송이 비교적 잘 퍼져 나갈 수 있는 부지 중 에서 구하기 쉬운 부지로 이왕직의 땅 190평을 임대받아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때는 방송국이 높은 곳에 있어야 방송이 잘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6.25때 이 방송국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피난 가 있는 동안에는 그 비좁은 부산방송국를 사용했고요. 부산 피난간 사이 정동방송국 건물은 잿더미가 되어 방송국 옆에 있던 조선방송협회 사무동을 방송실로 개조해서 임시 방송연주실로 사용했습니다. 연주실이 좁아 공개방송은 지금 신세계백화점이 된 동화백화점이나 명동 케도릭 회관 등에서 하다가 1957년 7월부터 지금 서울 신문사 자리에 있던 대한 공론사 3층에 240석에 이르는 연주실을 만들어 (1957년 7월 개관) 활용했습니다.
남산에서는 1957년 12월부터 방송했고요 이 터는 원래 일본 총독부 자리였습니다. 20년의 남산방송 시절을 지나 1976년에 이곳 여의도로 왔지요. 다음 기회 되면 이곳으로 온 얽힌 얘기도 해 드리지요. 이곳에 원래는 20층 건물로 방송특성에 맞는 건물을 세우려고 설계를 끝냈는데 국회가 들어오면서 국회 건물보다 더 높이 지을 수 없다고 해서 오늘의 건물이 된 것입니다. 5.16이 나고 TV방송실시를 서둘면서 남산의 라디오 방송국 길 하나 건너에 TV방송국을 건립하고 1961년 12월 31일 방송을 시작 했습니다. 이 터는 원래 일본 절, 동본원사 터였습니다.
7. 지금 가지고 나오신 사진들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 방송 마이크에 붙여진 호출부호 사진
1947년 10월 2일 최초로 방송마이크에 부착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呼出符號/Call Sign이여요. 이 호출부호를 마이크에 걸고 방송을 했지요. 사진이 좀 흐리지만 그때 사용한 명패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 1964년 10월 2일 제 1회 방송의 날 기념사진
1964년 10월 2일 최초로 우리나라 국·민영 방송인들이 함께 만나 서울 중로 중앙청 옆에 있던 진명여고 3·1당에서 제1회 방송의 날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기독교방송 KY는 1954년에 창설되었고 1960년대 들어 서울에 MBC 문화방송, DBS 동아방송, RSB 라디오 서울 등 민영방송국이 세워졌지요. 부산 문화방송은 1959년 4월 15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이지요. 상업 TV방송은 1956년에 생겼다가 사라졌고요. 제1회 방송의 날은 국·민영, 모든 방송인들이 자리를 함께 한 최초의 모임입니다. 저도 그때 방송국 밖에서 한 행사에 처음 참석 했었습니다. 올해로 벌써 59회가 되는군요.
8. 그러니까 원래 방송의 날은 오늘 9월 3일이 아니라 10월 2일 이었네요?
네,
- 이것이 왜 오늘 9월 3일로 바뀌게 되었나요?
KBS 공영방송출범을 계기로 1974년 1월 「한국방송협회」가 결성된 후 정부에서 하던 이 행사를 협회에서 주관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방송의 날을 바꾸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지요. 10월 2일 전후해서 개천절·국군의 날이 있기도 하고 또 민영방송 입장에서 보면 이 호출부호를 처음 실시 한 날도 아니고요. 그래서 1978년 한국방송협회 총회 결정에 따라 9월3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날을 계기로「한국방송대상」행사도 해서 많은 프로그램과 방송인들을 선발해서 상을 주고 있지요. 원래 방송인들에게는 상 주는 것이 인색했어요.
1958년 젊은 오재경 공보실장이 방송에 새 바람을 불러 넣어야 되겠다고 방송문화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이 상이 정규적으로 실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 상이었습니다. 각 분야별로 6명씩 선발해서 시상했고 가끔 공로상을 주었습니다. 11회까지 하다가 1968년 이후 폐지되고 콘테스트 등의 상으로 바뀌었어요. 세월이 좀 지나 1973년 문화공보부 주관으로 「대한민국 방송 상」이 생겼고 이것을 방송협회가 인수하면서 1976년부터「한국방송대상」이 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9. <춘하추동방송역사>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시지요?
네,
10. 사이버 방송국 국장님이십니다.
저를 왜? 사이버 방송국장이라고 하시는데 원래 제가 방송국 제직 시 국장을 한 사람이 이런 불로그를 운영하니까. 「청사 없는 방송국, 연봉 없는 방송국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니 언재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춘하추동방송국장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처음에 이 말을 사용한 분은 이정부 아나운서였습니다.
-오늘 가지고 나오신 이와 같은 방송자료들과 기록들은 언제 수집하신 겁니까?-
제가 방송국에서 퇴직을 하고 퇴직 사원 모임 KBS사우회에 가입해서 부회장을 했어요. 그때 서병주 사우회 회장께서 사우회가 좀 더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여러 일들을 했습니다. 2005년, 그때는 사람도 많지 않고 지금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을 때예요. 인터넷은 있었지만 사용자가 극히 적었죠. 이런 시대에 그 사람들이 1년에 3,4번 만나서 식사나 하고 헤어지고. 그리고는 서로 연락 없이 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별 의미가 없잖아요. 이 분들의 마음의 끈을 연결해줘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가지고 이메일을 다 모았어요. 그분들 중에 이메일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만. 그랬더니 한 150개 되더라고요. 그러고 제가 블로그를 열고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이메일로 내용을 보냈어요. 그런데 그것이 세월이 자꾸 가면서 아 바로 이거구나. 이게 서로간의 마음의 끈을 연결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해가지고 아주 호응이 컸어요. 이메일을 많이 보낼 때는 2,000여개가 되었어요. 그 이메일 주소 지금도 다 있습니다. 그 뒤 사우회가 열심히 일을 해서 지금은 사우회 회원 수도 많이 늘어 3,000명이 넘어 언론사 퇴직사원 모임으로는 가장 큰 모임이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때방송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방송 역사를 하다 보니까 선배고 후배고 만나고, 옛날에는 라디오 방송만 있었잖아요 텔레비전은 없었고 TV방송을 할 때도 처음에는 시청하는 이가 적었고. 그러니까 라디오 시대에 방송을 해도 어떤 분이 어떻게 방송하는지를 모르고 목소리만 듣던 시대인데 그때의 그 사진이라든지 또 그때의 목소리도 구할 수 있는 건 또 구해서 올린다든지. 이렇게 하다 보니까 방송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아주 흥미를 갖는 거예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도 그래요, 서로 얘기를 나누며 17년간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1, <춘하추동방송>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겠지요? 얼마나 많은 계시물들이
올라있나요?
건수로 보면 블로그에 3,000여건 내용이 있고 그밖에 유튜브, 카카오, 네이버 등에 동영상 등이 있어서 4,000여건 되지요. 여기서 <춘하추동방송> 불로그 얘기를 좀 하자면
제 이름이 장춘이거든요. 이것을 긴 봄이라고 보면 춘하추동이라고 해서 저를 춘하추동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서 블로그 이름을 춘하추동이라고 했더니 이 이름이 너무 많아 제 블로그 검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방송을 붙였더니 그런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지금은 네이버 등에서 춘하추동방송이나 이장춘을 검색하고 들어오신 분들이 많아 졌어요.
- 자료들을 분석하면 어떻습니까? 방 소개 좀 해 주시지요?
주요 카테고리를 보면
한국방송역사 90년 (18)
기본분야 (894)
방송인물 (225)
일제 강점기 방송 (26)
해방공간의 방송 (34)
정동, 남산시절 (59)
6.25와 방송 (57)
민영방송 (68)
지역방송 (49)
독립운동 (103) 주로 단바방송 건이지요.
방우회· 사우회 · 문공회 (94)
방송기술 (63)
한국아나운서클럽 (82)
미주방송인협회 (44)
문화재, 세계유산 (67)
올림픽 체육 (27)
역대 대통령 (21)
방송음악 백년 (249) 이런 식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밖에 춘하추동방송 단상이라고 해서 제가 보고 느낀 글도 있고요.
이 글 속에는 혹시 1990년 초에 있었던 KBS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일을 KBS인의 시각으로 본 내용을 아주 자세히 써서 7편으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그때 그 일은 아마도 제가 쓴 글을 읽으셔야, 그 전모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 이사회를 맡은 방송 간부여서 그 일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고 120 면에 달하는 노트에 기록 했다가 정리한 것입니다.
외부인들이 쓴 글도 봤는데 시각이 달라서인지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노조 하시는 분들도 많이 보셨을 줄 합니다.
- 모두 다 정성이 담긴 소중한 자료들이겠습니다만 오늘 특별히 몇 가지만 골라 자랑을 해주신다면?
자랑이라고 할 건 없지만 유튜브와 다음에 600 여건의 동영상, 4,000여건의 글, 수 만장의 사진과 함께 쓴 글로 생생한 역사기록이 담겨 있고요. 내용으로 들어가면 노창성, 한덕봉, 최승일, 최승희, 이옥경, 송영호, 민재호, 문재안, 윤용노, 호기수, 위진록, 장기범, 한영섭, 황우겸, 임택근, 강영숙, 윤영중, 이성화, 최계환, 전영우, 최세훈, 박종세, 이광재, 황재경, 임국희, 윤백남, 이혜구, 복혜숙, 왕수복, 장민호, 이혜경, 정은숙 등 그 시대의 대표적인 방송인들의 목소리나 사진, 그분들을 소개하는 글 등 생생한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단파방송 독립운동 등 등 다른 곳에서 접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있고요. 각 방송국에서 필요 할 때는 자료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KBS에도 저와 얘기를 나누신 들 많으시지요. 작가 분들은 종종 전화도 오시고....., 사진 밑에 춘하추동방송 네임이 들어간 사진을 사용하는 방송국도 있어요. 각 방송국 방송인들이나, 대학교수님들도 자주 찾으십니다.
- 그럼 오늘 방송의 날을 맞아서 특별한 오디오 자료하나 들려주신다고요? 듣고 말씀 이어가겠습니다.
이 음향 역시 어디에도 없는 아마 KBS에도 없을 겁니다. 임택근 아나운서 1960년대 퀴즈열차 공개방송 목소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자료. 임택근 아나운서 스포츠 중계자료 + 만나고 logo + 시각고지
12. 오늘 방송의 날 들으니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전설적인 임택근 아나운서 목소리 맞지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네,
1951년 부산피난시절 대학교 졸업자가 방송국에 들어 올 수 있었는데 대학교 1학년생으로 당시의 노창성 방송국장을 찾아가 어떻게든지 아나운서글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졸라 방시험을 거쳐 방송국에 들어 왔습니다. 방송국에 들어온 임택근 아나운서는 뉴스를 비롯해서, 공개방송, 중계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분으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밀까한 아나운서라고 높이 칭송을 받았어요.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롤 타고 가면서 모든 간판을 빠짐없이 읽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 최장수 프로그램 노래자랑을 처음 하신분이기도 하고, 그때는 그 유명한 장기범 아나운서와 번갈아 가면서 했습니다. 장기범 아나운서 여러 목소리나 사진등과 함께 소개하는 글도 여러 편 있습니다. MBC가 초창기에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임택근 아나운서를 모셔가 MBC를 살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MBC에서 상무, 전무, 사장 직무대행까지 했지요.
13. 이제 선생님 개인적인 얘기 좀 여쭙겠습니다.
제 개인 얘긴 들려드릴 것이 없지만 물으시는 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올해 연세가 몇이세요?
41년생 우리나이로 하면 82이군요.
- 고향은 어디십니까?
전라북도 순창 복흥이라는 고원인데 노령산맥 중 산중이지요.
내장산을 가 보신 분은 산위로 절벽위에 차가 다니는 길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면 저희 고향입니다.
- 당시에는 고향이 아주 두메산골이었군요?
지금도 마찬가지여요, 내장사, 백양사, 섬진강으로 통하는 관광도로가 있어서 교통은 많이 좋아졌지만요.
- 그럼 어릴 때 고향에서 라디오를 들으신 우억이 있으신지요.?
그 시대에는 그런 시골에 라디오도 없었어요. 60년대 들어 스피컬를 걸고 방송을 들었지요. 그 스피커를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소식을 알며 즐거움을 주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그 시절에는 KBS만 들을 수 있어서 그것이 방송의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1956년 멜 보른 올림픽 때 송순천 선수 경기실황을 확성기로 방송 해 준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14. 어떻게 KBS에 들어오시게 되었나요? 언제 입사하셨어요?
1963년에요.
- 어디서 입사 시험을 보셨고, 첫 발령지는 어디였나요?
총무처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국제방송국 ‘제일과’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공방송을 하는 곳이어서 대공과라고 도 했지요. 그때는 방송국직원이 모두 공무원이었어요. 공사 전이니까요.
- 36년 재직하면서 여러 직종을 두루 거치며 많은 일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기자, PD, 공사 창립시 창립 실무단 단원, 공사 창립 후 기획관리실 첫 관리부 차장, 시청료 받는 일선책임자, 전산정보실장, 관재국장, 업무국장, 제주방송 총국장 등을 했습니다.
15. 오늘 방송의 날을 맞아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 그러면 끝으로 우리나라 방송 역사에 가장 기념비적인 방송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꼽으신다면?
1927년 2월 16일 이 땅에서 처음 방송을 내 보낸 일, 1933년 4월 우리말 방송 전담 채널이 새로 생긴 일, 일제 강점기 말 방송인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듣고 독립운동가 들이나 주변에 알려서 독립운동 밑거름으로 삼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 했던 일, 지금 KBS 정원에 그 일을 영원히 기리자는 勿忘碑가 있습니다. 그 일을 기리기 위해 방송인들이 세운 비지요. 해마다 방송인들이 만나 그날을 기립니다. 해방되어 우리 방송을 우리가 할 수 있게 된 것 아주 뜻 깊은 일이지요, 1961년 12월 31일 KBS가 TV방송을 실시 한일, 1973년 국영방송이 공영방송으로 전환된 것, 1980년 컬러 TV방송실시, 1983년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 그리고 2,000년대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 된 것, 등등...
Closing 선생님 내내 건강하시고 귀중한 자료들, 앞으로 대한민국 방송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신청곡 한곡 부탁드립니다.
전영우 아나운서가 1967년 동아방송국 아나운서 실장시절에 작사해서 페티 킴이 부른 사랑의 계절을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