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계의 큰 별 박용구 선생님
박용구 선생님은 1914년 태어나 2017년 8월 6일 세상을 뜰 때까지 음악과 함께 하다 가신 음악계의 큰 별이시다. 일제강점기 안기영, 채동선, 김순남, 이건우, 박영근, 김형로, 최희남 등 민족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했다. 그 많은 민족 음악가들이 1945년 해방되던 날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해방공간에서 공산당이 불법화되던 때를 전후해서 대부분 월북 했지만 박용구 선생님 (이하 존칭생략) 채동선은 남한에 남아서 오랜세월 음악활동을 했다. 필자가 박용구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살짜기 옵서예」로부터 비롯되어 그 주제곡을 머리 동영상으로 올렸다. 음악계의 큰 별 박용구 선생님 박용구선생님 100세 때의 모습 박용구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음악사를 정리해온 음악평론가이자 1960년대 KBS 음악계장을 지낸 「이상만」, 또 음악계의 큰 별로 50 여권의 음악저서를 낸 「송 방송」 박사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상만은 필자 이장춘의 방송 선배로 반세기가 넘는 세월 인연을 맺어왔고 송방송 박사는 5년 가까운 세월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신 유경환 여사의 남편으로 친분이 깊은 분들이시다. 송방송 박사님 글 송방송 박사님 박용구 출생 1914년 평양고보(平壤高普)를 거쳐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에서 수학했다. 1937년 음악학교를 졸업하자 음악평론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7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춘향전·"벌판"·"지평선" 등을 무대에 올렸고, 기관지 『막』(幕)을 발행해 음악비평의 선두주자로 활동했다. 1940년 귀국하여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잠시 지내던 국내활동을 접고 서울을 떠나 하얼빈 등지를 돌며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그곳에서도 극단을 조직해 무대에 올렸다. 1941년 언론인 설의식(薛義植), 연극인 서항석(徐恒錫), 극작가 박노홍 (朴魯洪)이 중심이 되어 민족적인 가극운동을 부르짖고 일어섰을 당시에 출범한 라미라가극단 (羅美羅歌劇團)이 안기영(安基永) 작곡의 가극 "콩쥐팥쥐"를 첫무대에 올렸다. 이어 가극 "견우직녀"(牽牛織女)를 부민관에 올려 성공을 거두었을 때, 바리톤 박용구는 소프라노 성애라 (成愛羅)를 비롯해 윤부길(尹富吉)·이성운(李成雲)· 송진혁(宋鎭赫)·권진원(權鎭源)·민경식(閔景植)· 임천수(林千壽)·김형래(金炯來)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2년 평양에서 성공적인 극단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해방되기까지 경성 동흥실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글 "서론적(緖論的)인 음악극론(音樂劇論)"은 『幕』(1939) 3호에 발표 했고, 그의 글 "음악계의 파행성(跛行性): 악계의 1년"은 『춘추』(1943) 34호에 발표되었다. 1946년 『신세대』 (1946) 2월에 발표한 "음악유산의 섭취문제: 베토벤의 방법과 무소르그스키적 방법"은 민족음악의 수립과 관련된 대표적인 글의 하나이다. 1960년 12월 베르디의 "오델로" 공연 때 연출했고, 1962년 1월 '옛과 어제를 그리며 내일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으로 예그린 악단이 창단됐을 때 음악고문위원이었다. 1976년에 발족한 음악팬클럽의 회장이었고, 1976년도 일간지 또는 월간지에 평론을 발표하였다. 1977년 김형주·이상만·이성삼 등과 함께 일간지를 통해 평론활동을 폈고, 주로 『공간』과 『현대예술』에 평론을 발표했다. 국립국악원 정례발표회 때 "한국전통음악의 세계성"을 발표하였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예술제 때 공연된 황병기 (黃秉冀) 작곡의 무용극 "바리" 대본을 창작했다. 1979년 『공간』에 음악평론을 발표했으며, 1980년도 『공간』·『극장예술』에 음악평을 실었다. 1983년 9월 20일자 서울신문에 음 악평을 발표했고, 1984년 10월 13일자 한국일보에 음악평을 발표했으며, 『음악동아』·『객석』· 『공간』·일간신문 등에 음악평을 발표하였다. 1986년『공간』·한국일보에 음악평을 발표했고, 1987년 『객석』 등에 총 14회의 음악평을 발표하였다. 1988년 『객석』에 총 8편의 음악평을 발표했고, 1989년 『객석』·『레코드 음악』에 시평 또는 비평문을 발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용구 [朴容九]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이상만 선생님 글 이상만선생님 글은 2016년 7월호 문예춘추의 좌담회 글을 김문기의 포토랜드에 올려 놓았기에 이상만 선생님 말씀만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따라서 다소 연결히 자연스럽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실 분은 아래 원문글을 보실 수 있도록 연결했습니다. 2016년 문예춘추 좌담회에서 이상만 선생님 이상만: 원래 박용구 선생은 경상북도 풍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옛날에 정감록비결에 십승지지(十勝之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십승지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말하는데 그 중 풍기가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안도분들이 대거 풍기로 이사를 갑니다. 그래서 박용구 선생의 선친이 풍기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죠. 풍기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평안도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면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던 유명한 냉면집도 두 군데나 있습니다. 박용구씨 집안이 교육적으로 깨어있는 집안이라서 박용구 선생은 풍기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당시 풍기 사람들이 평양으로 유학을 많이 보냈습니다. 평양으로 유학을 가서 평양의 명문인 평양고보 혹은 평이중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평양고보는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를 네 사람을 낸 유명한 곳입니다. 노신영, 이영국, 육군 참모총장이며 육군 군악대를 창설한 김계원도 그 학교를 나왔습니다. 또한, 요즘 매스컴에서 많이 튀는 김동길씨도 박용구 선생의 평양고보 후배 입니다. 그런 평양고보의 명문에서 공부를 하면서 체계적인 학문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중앙음악학교라고 하는 곳에서 성악을 전공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본대학교 문과에 들어가서 일본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일본어 필체 라던가 이러한 것들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 당시 <음악평론사>라고 하는 일본의 잡지에 기자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 <음악평론사>의 주관이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인 야마네긴지라 고 하는 사람입니다. 박선생이 그곳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나라에 와서 음악 평론 활동을 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음악 평론 활동도 이미 시작을 했고 안기영씨가 하는 악극단 관계를 하게 됩니다. 또한 1944년 해방직전까지 경성 동흥실업학교에서 교사로 생활 합니다. 일제 강점기시대에 활동했던 음악 평론가인 김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굉장한 혹평으로 유명했고 해방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박용구 선생이 글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매우 각박했다. 하지만 그분의 통찰력과 문장력이 대단한 힘을 가직 있었기 때문에 박용구씨의 손을 들었습니다. 이전에 말씀하신 <음악과 현실>이라고 하는 음악평론집은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음악평론집을 낸 것입니다. <음악과 현실>에서 현제명 선생에 대한 날카로운 혹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현실>은 판매 금지가 되었다. 박용구씨 주위에는 음악가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 중에 문학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설정식, 김동석씨 입니다. 그분이 음악학교를 다녔지만 일본대학에서 문학적인 수련을 했기 때문에 평론에 대한 기초적인 능력이 갖춰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선생님이 해방 후에 중요한 작업인 중등음악교본을 편찬을 했습 니다. 그 교본에 실린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어서 음악교육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초창기에 우리나라의 음악적 풍토들을 평론으로 정리한 분이 박용구씨가 최초이고 그 필력이 대단히 강해서 신문을 통해서 사회목탁이라는 것을 실현한 분이 그분입니다. 당시에 동아일보가 매체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는데 그곳에 평을 쓰시면서 천하무적의 필봉을 내둘렀습니다. 또한, 그 분은 체구가 작았지만 속에는 평안도 기질이 굉장해서 욱하면 사람들이 꼼짝 못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분이 여러 가지 문학적인 식견과 문장력을 가졌고 세계를 보는 역사관들이 뚜렷했기 때문에 전무후무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박용구 선생님은 많은 오페라를 연출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업적은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써 1962년에 가무극 (오늘날의 뮤지컬)을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1988년에 88올림픽 개회식에 「벽을 넘어서」라는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피력한 사상이 천지인 사상입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관이 많이 바뀌었는데 이 분은 이 작품으로 인해 빛을 보지는 못하셨습니다. 또한 이 분은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음악계뿐만 아니라 무용계에도 많은 대본을 쓰셨습니다. 한 가지 여담으로 얘기하면, 1960년대 외국 영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박용구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그 당시 외국 영화는 주로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신 선생님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활동하는 영역이 폭 넓었지만 처음에 글을 많이 쓰게 된 것은 <공간>이라는 작품이며 김수근씨와 일본에서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김수근씨가 공간을 운영하는 부분에 대한 아이디어를 박용구씨에게서 많이 얻었습니다. 공간사랑을 만든 것이 박용구씨의 아이디어입니다. 박용구 선생님이 결혼을 3번 하셨습니다마는 박용구 선생님의 주위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많아서, 여자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분이 굉장히 탁월한 역사학자입니다. 특히, 역사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삼구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우리나라 관악파들이 쓴 역사관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문필이 대단한 것은 많은 책을 섭렵하셨습니다. 특히, 일본에 관련된 책 같은 것은 그분의 집에 가봐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이건용 선생님께서 세이장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건축가인 김수근씨가 집을 지어준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살아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고 문화방송진흥에서 이사장을 3년간 하실 당시에만 여유로웠습니다. 박용구 선생님이 멋쟁이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옷을 제일 잘 입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 분의 서체가 독특했습니다. 나중에 붓글씨로 전시회를 하셨습니다. 또한 이 양반이 철봉을 잘하십니다. 정신이나 육체적으로 103세를 살만큼 요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술을 못하셨습니다. 이상만선생님 글은 2016년 7월호 문예춘추의 좌담회 글을 김문기의 포토랜드에 올려 놓았기에 이상만 선생님 말씀만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따라서 다소 연결히 자연스럽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실 분은 아래 원문글을 보실 수 있도록 연결했습니다. 박용구 글을 춘하추동방송에 올리게 된 인연 <그 1> 1966년 김영수 선생님(이하 존칭생략)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뮤지컬「살짜기 옵서예」대본을 써서 「예그린 악단」의 출연으로 무대에 올려져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 전신)에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자세한 내용 밑에 연결) 그리고 세월이 지나 2013년, 예술의 전당에서 다시 공연 되었을 때 미국에 사는 김영수 딸 김유미 여사가 특별초청 되었다. 김유미 여사는 필자 이장춘과 동년배로 196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문학 활동을 한 재미 작가이며 교육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필자와 만난 김유미 여사와 그 주제가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김유미님 2013년 내한시 공사중인 황궁우에서 김영수는 일찍부터 연극이나 드라마 대본을 써 왔고 노래가사도 써 왔기에 이 주제곡도 당연히 대본 작가가 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받아드려졌다. 김 여사는 지금까지 그 작품을 사용하겠다고 승낙해 달라는 사람도 있어서 그렇게 해 왔었다. 고 했다. 그런데 이때 작사자로 박용구라는 이름이 등장 했다. 획인은 안되었지만 어찌 되었던 박용구라는 성함을 알게 되었다. 살짜기 옵서예 작사 김영수 작곡 최창권 노래 패티 김 (1966년 첫 공연) 당신 생각에 부풀은 이 가슴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 달 밝은 밤에도 어두운 밤에도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 바람이 불거나 눈 비가 오거나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 꿈에도 못잊을 그리운 임이여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 박용구 글을 올리게 된 인연 <그 2> 강현두 작품전시회에 나온 박용구선생님 내외분 「살짜기 옵서예」공연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그해 4월 강현두 교수 「몸 이야기」작품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 뜻 밖에도 백세노인 박용구 옹이 참여해서 축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짜기 옵서예 박용구가 이분인줄 몰랐다. 박용구는 백세에도 젊음과 낭랑한 목소리로 축사를 해 주셨다. 함께 전시회를 관람한 안평선이 아! 저분 유명한 음악가이신데 사진을 촬영 해 놓으면 좋겠다는 제안에 따라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 했다. 「살짜기 옵서예」 주제곡 작곡가가 이 분이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리고 그 분이 왕년의 민족음악 대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박용구 글을 올리게 된 인연 <그 3> 2017 년 8월 29일 필자의 사위 강경태로 부터 노동은 · 이건용 공저 1991년판「민족음악론」책을 전해받았다. 이 책에서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공간의 민족 음악가 들의 활동상이 자세히 기록되어있고 박용구 채동선 등 그 시대 음악가들의 기록도 함께 볼 수 있었다. 100세나 된 박용구 옹이 강현두 교수 작품전시회 축사를 하게 된 사연도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강현두 교수 부인 그 유명한 김세원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김순남과의 친분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나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 기회에 박용구 옹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 보려는 마음으로 안평선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분 이달 초 8월 6일 104살을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생님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박 옹을 잘 아는 송 방송, 이상만 두 분의 글을 올려 춘하추동방송의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고저한다. 박 옹의 아들 박예원은 KBS 기자로 재직 중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관련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 합니다. 살짜기 옵서예에 출연하던 시절 1960년 패티 김 2013년 예술의 전당 로비에 설치된 살짜기 올서예 대형 포스터 앞에서 왼쪽부터 계원준, 우제탁, 000, 김명희. 권영원, 베레나 유경환 (유카리나)여사님 글 2017.09.01 06:48 먼저 박용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104세를 사셨으니, 참으로 드물게 5복의 장수를 누리셨고, 또한 이나라 음악 예술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고 가셨으니 복되신 분이십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6.25 등을 겪으면서 누구에게나 아프고 어려운 시절을 겪으셨지만,세상을 뜨시기 까지 백수를 넘기시며 활동을 하신 복된 분이시니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방송 드라마 선구자 김영수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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