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임택근
.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1C7-A-cHvI4 1950년대로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임택근 아나운서! 국민들은 그 목소리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마음을 모아 왔으며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아나운서의 꿈을 심어 주었다. 춘하추동방송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여러 편의 글을 써 올렸고 오늘 임택근 아나운서가 깊숙이 간직 해 오셨던 사진들을 모아 또 한편의 글을 쓴다. 아나운서 임택근 2012년 5월 한국아나운서클럽 만남의 사진을 본 한 원로방송인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오셨다. 2012년 5월 한국아나운서클럽 만남의 각종 사진자료는 방송사상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부산 피난살이 1951년 일간지상을 통해서 아나운서 모집 광고를 본 기억이 있었고 그후 임택근아나운서의 방송은 전파를 타고 우주공간에 메아리 쳤습니다. 당시 그 미성(美聲) 의 주인공들이 모이신 자리는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고 2짜리 학생으로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였지만 방송계에 종사 했다는 일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귀중한 자료 감사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50년대 60년대 대한민국 국민이면 임택근 아나운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뉴스, 공개방송 사회,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중계방송 등 주요방송프로그램에서는 으레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골에서 서울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방송국을 찾았고 임택근 아나운서를 볼 수 있다면 더 없는 행운이었다. 임택근의 공개방송 사회를 보는 날이면 방송국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마라톤 등 중계방송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고 임택근 아난운서는 회고한다. 중계방송 차 위에 올라타고 마라톤 선수들의 뒤를 따르며 생으로 중계방송을 할 때는 그 주변 상황까지도 모두 생방송으로 묘사되었다. 무슨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쉼 없는 말을 이어가며 방송시간을 공백 없이 매꾸어 나갔다. 3.1절 행사 등 유난히도 시가행진이 많던 시절 그 상황을 묘사하며 하는 방송을 듣는 청취자는 임택근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중계방송을 들었던 시절이다. 위 휘문고등학교 졸업 때의 사진 아래 초기 임택근 아나운서 부산 피난시절 임택근 입사무렵의 사진
1951년 6.25전쟁 중 부산에 가 있던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선발했다. 대학을 졸업해야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던 시절 부산피난시절 임택근은 연세대학교 1학년 재학 중이었다. 감히 아나운서 꿈을 꿀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19살의 대학교 1학년 학생 임택근은 노창성 중앙방송국장을 찾아갔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목소리를 한번만 이라도 들어 보아 달라는 임택근의 간청에 노창성 국장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험에 응시 할 수 있도록 특별 배려했다. 대학교 1학년 어린학생 임택근은 그 시험에 합격해서 아나운서로서의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몇 달이고 뒷자리에 앉아서 콜사인만 넣어야 했던 시절에 바로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1953년 방송국이 서울로 오면서 그의 역량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동화백화점 (신세계백화점)에서 노래자랑공개방송 1955년 대한민국 땅에서 최초로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었다. 방송국 스튜디오가 좁아서 동화백화점(신세계 백화점)을 빌려 공개방송을 시작했다. 이때 동화백화점에서는 스무고개와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었다. 첫날 노래자랑은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가 담당했고 스무고개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그로부터 중앙방송국의 중요한 공개방송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던 노래자랑과 스무고개는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가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맡았다. 오랜 세월 송해가 인기를 모으는 노래자랑 원조사회는 장기범 · 임택근이었고 젊고 잘 생기고, 목소리 아름답고, 말 잘하는 임택근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은 줄을 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 할 때는 노래 부를 사람이 없으면 어쩔까? 방청객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하며 시작된 노래자랑은 인기리에 오랜세월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에서 제 16회 멜버른 올림픽이 열렸다. 많은 선배 아나운서들을 뒤로 하고 장기범 아나운서, 김성열 엔지니어와 함께 올림픽 중계방송 장도에 올랐다. 권투에서 송순천선수가 아깝게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에 머물렀던 그로부터 60년이 더 지난 그 대회다. 그 대회 올림픽 중계방송에 임한 모든 아나운서 중에서 가장 젊은 24살 임택근의 목소리는 만천하에 울려퍼졌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는 확성기를 통해서 그 중계방송을 전교생에게 들려주어서 그 방송을 들었던 필자의 머릿속에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때 마라톤에 출전해서 4위를 기록한 이창훈 선수는 오랜 세월 선수와 중계방송아나운서로 인연을 맺었다. 위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마라톤 4위 이창훈과 함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2년 뒤 임택근 아나운서 중계방송한 제3회 아시안께임에서 1위로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는 이창훈 선수의 모습이다. 여기에 관해 윤미림 성우가 쓴 자세한 글이 있다.
위는 1960년 로마올림픽 중계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이고 아래 1964년 동경올림픽 축구경기장 중계방송 장면 그로부터 임택근은 1960 로마, 1964년 동경, 1968년 멕시코 연 4회에 걸친 올림픽 중계방송을 해서 전무후무한 4회연속 올림픽 중계방송을 한 기록을 세웠다. 1964년 MBC로 옮겼기에 1956년과 60년은 KBS 아나운서로, 1964년, 68년은 MBC아나운서로 참여했다. 1964년 MBC 동경 올림픽 중계방송은 강영숙 아나운서 가 여성으로는 처음 올림픽을 중계 방송 기록을 세웠다. 강영숙 아나운서와 함께 MBC 시절 KBS아나운서실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임택근 아나운서가 1964년 4월 MBC로 옮겼다. 발령일자는 2월 26일 이었지만 실재로 근무한 것은 4월 부터다. 그 시절 MBC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재력가이자 부산 MBC사장이던 김지태의 재력을 바탕으로 이어가던 서울 MBC가 갑자기 5.16장학회로 넘어가면서 인력과 재력면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서울 MBC창립인사들은 'RSB 라디오 서울' 창립에 참여 하면서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인력 공백상태에 이르고 자금줄이 끊겨 어려움이 극도에 달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그 어려움을 타개하는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다. 직책은 방송부장, 방송분야를 총괄하는 자리였고 아나운서 실장은 KBS에서 최세훈을 영입했어도 중요프로그램은 여전히 임택근 몫이었다. 김기수 선수와 인터뷰하는 임택근 아나운서 동영상에서 틀리는 목소리 1966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장충 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1(72-69 68-72 74-68) 판정승으로 꺾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을 때 중계방송 목소리다. MBC에서 임택근의 방송, 임택근의 목소리와 함께 청취자가 늘어나고 경영은 차츰 호전되어 1969년 8월 8일을 기해서 텔레비전방송도 함께했다. TV개국과 함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진행자의 이름을 넣은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임택근 모닝 쇼’ 임택근은 MBC 상무가 되어 방송 경영 일선에서 활동했지만 여전히 방송현업에서 그의 명성은 이어졌다. 전무시절1980년 격동기에는 사장직무대행을 맡아 업무로 수행했다. 위 1962년 방송문화상 수상
서울시 문화상 1966년 아래 1977년 옥관문화훈장 수훈 임택근은 방송공로로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1961년 녹조 근정훈장 수훈을 비롯해서 1962년 그 시절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 제5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했다. 1966년 서울시 문화상, 1969년 방송 유공자 표창, 1977년 옥관 문화훈장,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2,000년 7월 13일 대한 체육회 창립 80년 공로패를 받았다. 그리고 2009. 3월 27일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더 자세한 이미 써 올린 글과 약력으로 대신한다. . 임택근 아나운서 약력
1932년 12월 8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출생
1939년 서울 수송국민학교 입학
1945년 휘문중학교 입학
1949년 5월 1일 시공관에서 공연한 연극 낙랑공주와 마의태자-왕건역-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연희대학교 압학
1951년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학업, 방송 병행)
1953년 연희대 연극반인 연희 연극 예술연구회 창립 대표
1954년 축구 중계방송 시작
1955년 5월 서울 환도후 최초의 스무고개 공개방송 사회
1957년 노래자랑 장기범 아나운서와 번갈아 가며 진행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 장기범 아나운서와
1959년 제 4회 아시아 여자 농구대회 중계방송(마닐라)
1959년 제 3 회 아시아 경기대회 중계방송 (일본)
1960년 이태리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이광재 아나운서와
1961년 5. 16 지지 육군 사관생도 시가행진 이동 중계방송
1961년 KBS 아나운서실장
1961년 12월 31일 KBS TV 개국식 진행 실황중계방송
1964년 4월 MBC 방송부장
1965년 7월 1일 문화방송 이사
1966년 2월 문화방송 상무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중계방송
1969년 MBC개국 프로그램 임택근 모닝쇼 진행( 진행자의 이름을 넣은 최초 프로)
1974년 방송협회 운영위원장
1974년 11월 1일 문화방송 경향신문 방송부문 전무
1980년 문화방송 사장 직무대행
1980년 7월 5일 무화방송 퇴직
문화방송 퇴직후 방송 문화 진흥회 이사, 대한교육보험 상무,
연세대 동문회 상근 부회장겸 사무총장,
코스모스 악기 고문,
아나운서 클럽회장,
한국복지재단 이사, 두리비젼 회장 등을 역임
상훈
1958년 공로표창-공보실장-
1961년 녹조 근정훈당
1962년 제5회 방송 문화상
1966년 서울시 문화상
1969년 방송 유공자 표창
1977년 옥관 문화훈장
2,000년 7월 13일 대한 체육회 창립 80주년 공로패
2009. 3. 27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액
화 보 .
1961년 12월 31일 KBS-TV개국 실황중계방송
이승만 대통령 장기범아나운서와 함께 오른쪽분 임택근 아나운서
5.16 지지 육군사관학교 시가행진 중계방송
KBS-TV초기 방송프로그램
MBC 아나운서들 청화대 방문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 장도에 오르던 때장기범(좌), 김성열(둥) 과 함께 한 임택근 아나운서(우)
사울시 문화상 시상식장에서 오른쪽 최창봉
MBC여의도사옥 기공
4.19 직후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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