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복혜숙, 성우, 연극, 최초의 영화배우

이장춘 2014. 11. 26. 04:47

 

 

 

복혜숙! 방송가에서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송 아가씨「방송 어머니방송 할머니

통했다. 1904년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大川)에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복마리(馬利). 그녀는 1910년대부터 연극배우로

 등단한 이래 1920년대 이 땅의   영화가  등하면서  최초의 

영화배우가 되었고  방송인으로, 연극인으로,  영화인으로, 

일생을  통해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드물다.

 

 

복혜숙, 성우, 연극, 최초의 영화배우

 

 

1959년 방송인으로서는최고의 영예로운

방송문화상을 받았고 1962년 후배 영화인들이

총출연하는님의 40주년 기념 스타의 밤 공연이 있었을 때

 화려한 인생역정의 꽃을피웠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81년

 “ 낮은 데로 임 하소서 ”영화에 출연하면서 할 수 있 는 일을 다 하고

 1982년 세상을뜨셨다. 떠나신지 30년이 넘었어도 님의 발자국은

크고 깊다. 들려오는 음향은 1963년 DBS동아방송 개국프로

그램에서 전영우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복혜숙이

 직접부른 "대 그립다" 이다.   

 

 

 

 

 
 죽어서 태어난 아이가 삶을 찾아 생을 이어가고,
국내에서 배움의 양이 안차 스스로 돈을 벌어 일본유학을 가고,
객지에 나가 못된 짓 한다고 일본에서 아버지에게 끌려오고, 시골 일본어
 교사생활이 불만족해서  집을 뛰쳐나오고, 극장가 돌아다니며  배우 시켜 달라
 사정하고, 온갖 고생 끝에 배우가 되건만 또 여의치 않아  기생이 되고,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의 인기 여배우, 방송극 출연자, 연극인 되었건만  생활비가 없어
 다방을 경영하고,  길고긴 삶에,  화려한 불꽃을 피우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복혜숙!    그  인생역정에  얽힌 극히 일부에 불과한
얘기일지라도 글을 여기 글을 올려 모두 함께  보려고 한다.
 

 

 

 
1919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수예선생이 되려고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지만

극장가를 돌아다니다보니 배우가 되고 싶었다. 목회자 이자 교직자

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딸이 일본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

대려다가 스스로 세운 강원도의 금화여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도록 했지만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녀는 다시 집을 나와 서울로 왔다.  그가 신파극이라고

 부르던 신극좌(新劇座)에 입단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때는 신파극의 전성기가

 지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 하고 있을 때라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직접 작품을 쓰고 그 연극무대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바로 그 무렵 1924년 말부터 이 땅에서
 방송시험전파가 발사되고 연극계에서 같이 활동

 하던 최승일(뒷날 동양 최고의 무희가 된 최승희의 큰 오빠)이

경성방송국 개국을 위한 시험방송에 참여 하면서   방송에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시험방송시절  이나라 최초의 방송극새벽종츨연자로

 기록된다.    그때는방송극이라는 말 따로 없었을때의 일이다. 연극무대를

마련하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청취자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상황설명을

 하면서  연극을 하면  그것이 바로 방송극이었습니다. 방송극은

 1925년 6월부터 매주 또는 격주로 정례화 되었다.

 

 

 

 
 시험방송이기는 했어도 정규방송처럼
방송 되어 출연자는 정규방송이나 시험방송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소설가요, 사회운동가였던 최승일은

 시험방송에서 방송극을 연극계의 동지들과  같이 했다. 방송국 개국

전후시기부터  방송극은 중요시 되어 1926년 6월에는 최승일이 이경손,

김영팔 등과 같이라디오 극 연구회를 창립하면서 라디오 극은 활성화 되고

  복혜숙의 역할은 더 중요시 되었다. 이 시기에 방송극과, 연극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연극계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토월회”가  방송극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복혜숙은 토월회 구성원으로서도 방송극에 적극 참여했다. 

그때 이름 있던 방송극 “혈육” 이나 “이 대감 망할 대감 “ 등이

토월회에서 참여한 작품이었다.  

 

그 무렵 이나라 史話, 영화의 개척자이자

뒷날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과장을 하게 되는

  윤교중(백남)의 권유를 받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 최초의 영화 농중조,장 안에 갖혀 사는 새」, 이 나라

최초의 영화이자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 1920년대

중반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되어 연극인, 영화인으로 활동했다.

1926년의 데뷰작  영화 농중조가 뒷날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나운규와

 함께 출연해서 장안의 회재가 되면서 그 인기는 치솟았다. 그는 1920년대가

다 가기전 홍련비련,  낙화유수,  세 동무,  지나가의 비밀 등의 작품에서

여 주인공을 맡아 신일선과 함께 당대 최고의  스타로 등단했다.

 

 

 

 

그로부터 영화출연도 자주 있었지만
출연자에게 개런티가 없던 시기인지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비너스 다방의 얼굴 마담으로 나섰다가
 다방의 경영주가 되어 8년 동안 그 일을 했다. 비록 그렇다 해도

그것은 생활수단이고  방송과 영화, 연극이 본업이었다.    1933년

우리말 방송인  제 2 방송이 따로 채널을 확보 하면서부터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기까지 방송극은 더 활성화 되어 전성기가 되었다.

 성우가 따로 없던 그 시절에 주요 방송극 배역진이나 낭독에는
 의례히 복혜숙의 명단이 올랐고 날마다 방송국을
드나드는 인사가 되었다.
 

 

 

 
1939년부터 경성방송국에서  방송극을

비롯해 많은 글을 쓴 방인근은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방송작품은  작가와 낭독자가 서로 호흡이

맞아야 했다.  그런 호흡은 복혜숙 여사가 잘 맞추어 주었고

 내 작품을 제일 많이 방송 해 주었다. 여사가 읽으면 안심

 수가 있었다 .어떤 분은 낭독을 잘 못해서 작품을 

잡치고 죽여 버리는 수 도 있었다 ”다.

 
복혜숙은 70년대 초까지 쉴 사이 없는
 활동했고 최고의 방송연기인이고, 영화인이고,
연극인이었다. 삶의 마지막 길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시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세월을
보내면서 1981년까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생이  다 할 때까지
하시던 일에 삶을 불살랐고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선각자의  길을 걸어오셨다.  복혜숙은 1982년 10월

5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생전에 영화평론가 이영일과의
인터뷰내용을 중심으로 복혜숙의 초기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끝낸다.

 
“ 그동안에 사는 고생은 말도 못해.
그땐 배우도 개런티니 뭐 그런 거 없어. 그때는
하루에 10전을 줘. 교통비 하라고. 그럼 그거 5전으로
 호떡을 하나 사서 두 끼를 먹고 또 5전으로는 전차타고 다니고.
내가 나중에 ‘비너스’ 할 때 커피 10전 하구, 홍차 8전을 했으니
 알 만하지. 배우학교에 다닐 때 이서구씨가 와서 토월회  ( 1923년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극단체. 주로 번역극을
소개. 복혜숙은 토월회 전성기인 1925년부터 활동했습니다)
하자 그래. 그때 토월회가 광무대를 썼는데 난 일 년 내내
거기 서 있었지. 연기는 여기서 다 배왔어.
 
<춘향전>을 제일 많이 했지. 장기공연에 재상연에
 전국 순회공연에. 그때 광무대 그 언저리 여관들이 전부
돈벌었다 그래. 시굴서 가식(가족- 필자주)끼리 모두 올라와서
보구 묵느라구들. 연극하고  이렇게 댕길 적에 윤백남씨가 오셔서
 “영화를 하나 맡았는데 너 나와서 좀 해라” 그러더라구.
그게 인제 <농중조>(籠中鳥)야.“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의 통속극, 농중조에서
 복혜숙의 역은 여주인공 마화숙이었다.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나운규가  조연으로
나와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영화였다.    19330년대부터는

 레코드 음반도 제작 판매해서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목장의 노래 등을 직접 불러 유행가 음반을 취입

하기도 했다. "목장의 노래" 가사다. 

 

1. 보리나무숲 그늘 푸르고
찔레꽃 봉우리에 이슬 맺힐 때에
아기시의 노니는 사랑을 따라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2. 포푸라 나무 숲 그늘 끝없는 저쪽
 불그레한 노녁놀 넘어 갈 때에
아가씨의 들기는 바다 푸르니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복혜숙 관련 동영상

 

 

음향을 먼저 끄셔요.

 

 

 

  1959년 제 2 회 방송문화상 복혜숙 시상식장면

 

 

1959년 제 2 회 방송문화상 시상식을

대한뉴스가 촬영해서 방영한 동영상 

 

 

 

 

영화 청춘쌍곡선 Hyperbolae of Youth(복혜숙 출연) 

 

 

  

 

복혜숙님 관련글 보기 (아래 영문자 클릭)

 

 

복혜숙 회고록, 최초의 영화배우, 최초의 방송성우, 방송할머니

http://blog.daum.net/jc21th/17781195

 

방송 할머니 복혜숙님의 시험방송 출연 체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391

 

강남달, 이정숙이 부른 1927년 낙화유수! 최초의 영화 주제곡

http://blog.daum.net/jc21th/17780586

 

꿈 많던 그때 그 시절 그사람들 복혜숙 오현주 여운계

http://blog.daum.net/jc21th/17782119

 

 

윤후현(팔팡미남) 선생님 글

 

 

잘 보았습니다. 어렸을때 복혜숙님!을
보아서 기억이 가물 가물 합니다. 방송과 가요계,

영화계를 두루 설렵하신 복혜숙님! 이 존경 스럽습니다.
지금은 연예인이 많아서 톱 이나 그 아래가 아니면 살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 당시에는 게런티가 너무 적어서 몸고생,

마음 고생이 심 하셨군요.예나 지금이나 유명 연예인들이 말년에는
살기가 좀 어려운 것 같더 라구요. 복혜숙님! 이승에서 못다한

 꿈과 열정을 하늘나라에서는 마음껏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 장춘 사장님!...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어떤 분인지는 몰랐어도,  그

존함 석자만은 많이도 들었던 분입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꿈을 이루시느라 참 파란만장한

생을 스스로 자초하셨으니, 운명이라고 해야하나요?
이렇게 철저히 자신이 원하고 지향하는 일생을 살아가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꾿꾿이

 불꽃처럼 살다가신 의지의 여성이셨다는 점을

높이어 본받고싶은 분이셨군요.

 

 

 

 1958년 사진.  김영수. 구봉서, 오승룡, 김희갑,  최세훈, 복혜숙,

 이향자 그때 그 사람들 방송극(라디오 드라마) 녹음장면, 그시절 드라마

 녹음시에는 앞, 뒤멘트를 넣기위해 아나운서가 참여했다.

 

 

 

1936년 방송 실연대회때 복혜숙님과 함께 출연한 강석연, 신은봉, 김용규, 윤성무(묘).

 

  

 

 

1933년 방송극 출연자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서월영, 김연실, 김선영, 강석연, 박진,  김용규,

이운방 박재형, 김선초, 윤성무 함께했다.  

 

 

    

 

위는 1964년 4월 13일 육군사관학교

재치문답 녹음을 마치고 이경희, 복혜숙, 조경희

박사가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재치문답은 그 시절

최고의 인기 공개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위는 TBC-TV에서 돌풍을 일으킨 아씨에 출연했을때의 복혜숙이고 

아래는 주인공에 대한 시상식장에 선 복혜숙이다.-1971년-

 

 

 

 

1960년대, 복혜숙 오른쪽부터 오현주, 복혜숙, 양방수와 함께

 

 위진록아나운서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복혜숙, 황정순, 위진록님

 

 

영화 청춘쌍곡선에 출연 했을때의 복혜숙

 

 

1958년에 찍은 복혜숙님 가족사진으로

 사위 성낙응과
딸 김진영 외손주는 영경,  철경이라고

했다. 김성진은 보건사회부장관을 지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복혜숙_육성.mp3

 

???_??.mp3
2.4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