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문화방송 개국 때부터 방송하신 이성화 아나운서께서 위 동영상을 보시고 글을 보내오셨기에 올립니다.
춘하추동방송국장님.
어폐를 무릅쓰고 말하고
싶습니다. 62년 전에 일어난
이 사실을 부산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시험지에 날려 쓴 현장 소식을 직접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리 어폐라고 말씀 드린
이유는 이 엄숙 하고 비참한 영상을 감히
예술적 다큐라고 하고 싶습니다.
62년 전 28세 청년 보도과장의
정의로운 심장의 소리를 그때의
영상에 맞게 편집을 하셔서 민주주의의
열망이 얼마나 올바로 강했는지 심장을
두드리는 작품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단한 사건이 부산 가까이 마산에서 터졌는데도 당시 부산KBS에서는 국영 방송이라는 한계로 일반 프로그람만 내보낸 것이 얼마나 속 좁고 나약한 눈치 방송이었던 것을 여실히 말해주지요.
당시 부산문화방송
전응덕 청년 보도과장의
또렷하고 자고저 명확한 음성은
요즘 대책 없이 훼손되고 있는
우리말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희망 해 봅니다.
역사적 영상에
역사적 음성을 맞게
편집 해주신 노고에 감사 말씀 드립니다.
이성화
전응덕, 대한민국 격변기에 대한민국 최초의 라디오 상업방송 부산 MBC의 보도과장이었던 님은 4.19 첫 발원, 마산의 학생 데모로부터 부산 일원의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의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담아 스스로의 목소리 리포트로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위 동영상은 그때 그 4.19 혁명, 현장의 소리를 KBS 영상과 함께 엮은 것이다. 동영상 안에 전응덕 선생님의 설명이 있다.
방송인 전응덕, 광고단체 연합회 회장
전응덕(全應德), 1954년 KBS 부산방송국 아나운서로 입문해서 최초의 민간상업방송 부산 MBC 문화방송의 아나운서실장 이자 보도과장, 서울 MBC, TBC동양방송, 중앙일보, 네 번에 걸친 KBS이사, 시청자위원장, 광고단체 연합회장을 지내는 등 60년을 이 나라 방송계 언론 또는 광고인으로 살아왔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출전 북한의 세계적인 육상선수 신금단과 그의 아버지 신문준의 역사적인 부녀상봉의 생생한 현장취재, 서강일 선수의 해외원정 중계방송 등 우리 나라 방송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굵직굵직한 특종보도의 기록을 남겼다.
군인신분으로 KBS부산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전응덕은 군복을 벗으면서 바로 부산방송국 아나운서로 부임했다. 부산에 있던 정부는 휴전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지만 아직도 부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름 있는 연예인들도 머무르고 있을 때 방송은 시민들 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었다. 그 무렵 서울을 비롯해서 새롭게 출발한 각 방송국에서는 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는데 힘을 기울였고 그 일환으로 각종공개방송이 탄생했다. 부산방송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연예인들이 남아 있어서 이들이 참여하는 공개방송도 할 수가 있어서 여건이 좋았다. 전응덕이 출연하는 공개방송은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전응덕은 인기를 더해갔다. 이때 부산에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 방송 MBC가 탄생했다.
전응덕 보도과장 시절 MBC 부산문화방송 기자들과 아나운서들
서울의 상업방송은 4.19나 5.16을 계기로 탄생했지만 부산의 경우는 우리나라 제2의 수도라는 점과 또 무차별 침투하는 일본방송을 막기 위해 방송국 설치가 절실 해 지면서 1959년 상업민영방송이 탄생했다. 이 방송이 대한민국 최초의 민영상업방송 부산 MBC HLKU다. 부산문화방송국 창설 되면서 KBS에서 인기를 끌던 전응덕은 MBC에 스카우트 되어 보도과장 겸 아나운서 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3.15부정선거가 있고 마산으로부터 규탄의 횃불이 올랐다. MBC 마이크가 현장으로 옮겨졌다. 국영이었던 KBS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민영방송이라 해도 방송국 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부의 뜻에 반해서 그토록 하는 일은 방송국의 운명을 거는 일이고 방송인으로서 생명을 거는 일이었다. 방송이 정의 편에 서야 된다는 용기를 가지고 현장에 나섰다. 뒤이어 보도기능이 없던 서울의 CBS기독교방송도 4.19 시위현장을 취재해서 방송하기에 이르렀다. 4.19는 마침내 성공했고 부산문화방송은 정부의 표창을 받았다. 그 부산 MBC취재 보도, 현장중계방송 등의 선봉에 전응덕이 있었다.
부산 MBC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서울에 와 또 하나의 문화방송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전응덕은 서울 문화방송으로 옮겼고 또 서울 문화방송을 만든 분들이 라디오 서울이나 TBC동양방송을 만드는 일이 참여 했을 때 전응덕 역시 이곳으로 옮겼다. TBC동양방송을 새울 때 편성에 홍두표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보도에 전응덕이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의 신금단 부녀상봉의 특종취재나 서강일 선수의 해외취재 등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보도국장을 하던 전응덕은 광고로 전직하면서 중앙일보 이사가 된다. 이때부터 전응덕의 진로가 바뀌었다. 발로 뛰고 목소리로, 또는 필봉을 휘두르던 아나운서 또는 보도기자가 경영분야의 광고를 받게 된 것이 오늘날의 광고인 전응덕을 있게 것이다. 방송과 경영을 넘나들며 방송인으로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전응덕이 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KBS가 처음으로 최고 의결기구 이사회가 민주적으로 구성되었을 때 제1기 이사로 참여한다. 필자가 전응덕을 본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KBS 제1기 이사회가 탄생하고 얼마 안 있다가 필자가 바로 이사회 업무를 맞게 되면서 만나분이 전응덕이사다.
대한민국 역사상, 또 KBS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구성한 이사회는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KBS운영에 임했다. 이때 이사가 된 전응덕은 제 2기에도 이어졌고 또 3기 4기를 건너 5기 6기에도 참여함으로서 KBS사상 최다수의 이사 경력 보유자가 되었다. 또 이사를 맞지 않던 시절에는 KBS시청자 위원장을 맞기도 해서 KBS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때는 KBS사장 물망에 오르 내리기도 했다.
전응덕이 KBS 1기 이사를 맞고 있던 그 무렵 광고단체 연합회 회장이 되어 오랜 세월, 이 나라 광고발전에 힘을 기울여 왔다. 특히 1996년 우리나라 에서 최초로 열린 광고 올림픽이라고 불리는제 35차 세계 광고대회는 세계 46개국에서 2천 5백여 명의 국내외 인사가 참여한 대규모의 국제적인 행사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해서 전응덕은 이 행사 공로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1932년 6월 20일 생으로 83세인 전응덕은 현재 황우겸, 임택근, 전영우, 박종세, 최만린, 강영숙등 원로 아나운서들과 함께 한국 아나운서 클럽 고문을 맞고 있다. 위 사진은 제 2기 이사회 구성을 마치고 KBS간부들과 함께 한 사진으로 이때의 이사로는 노정팔(이사장), 전응덕,강찬선, 김동철, 김동환, 김춘수, 박흥수, 윤여훈, 이혜복,홍기선님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는 제 6기 이사시절 2002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국제방송 교류와 해와방송 시찰을 위해 러시아와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으로 송재극 전응덕, 이연택, 김철수 이사님과 박원훈, 정중석님이다, 아래는 제2기 이사회 개최모습이다. TBC보도 전면에 선 사람들 왼쪽부터, 박종세 아나운서, 전응덕국장, 봉두완위원, 박노설 차장
최계환, 전응덕국장, 봉두완위원,박노설, 남정우, 신화철 아나운서와 함께
2001년 KBS교향악단 평양공연때 KBS시청자 위원장이었던 이정석, KBS 이사였던 송재극, 전응덕이 평양을 방문, 교향악단 공연 관람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