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방송국에서 KBS 전주방송총국까지 < 1 >
전주방송국은 이리방송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938년 10월 1일, 서울. 부산,
평양,청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현제 남한에 있는 방송국으로는 세번째로
세워진 방송국입니다.
호출부호 JBFK, 출력 500W 소규모 방송국이었어도
처음으로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역사적인 일로 지역민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위 사진은 개국기념사진으로 37년간
이나라 방송과 함께 해 오신 이인관님도 이리방송국
개설에 참여해서 2007년 2월 세상을 떠나실때까지
이리방송국 얘기를 하셨습니다.
다른 방송국은 모두 도청 소재지에 새웠지만
전라북도의 경우는 이리가 호남평야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이리, 군산등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다가 군산이 쌀을
실어 나르는 중심지가 되어 있는등 제반 입지조건이 좋은 이리에
방송국을 새웠습니다. 이 부문에 관해서 원로방송인
이용실님이 전해 오신 글을 함께 올립니다.
이용실님은 KBS 공사창립시 전주방송국 기술부장을 거쳐
본사 시설확장 본부장을 지내셨습니다. 지금은 방우회 회원이십니다.
이곳에서 방송을 시작 할때만 해도 도꾜에서
오는 일본어 방송을 중계방송했고 자체 방송은 적어서
방송국이라고 할것도 없었지만 방송극회나 합창단등 기본적인
방송 출연진은 있었고 초기 축하프로그램에는 이 지역의
학교나 기관, 국악인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는
축하 프로그램이 몇개월간 방송되었습니다.
1938년 12월 6일 개국기념 특집방송 모습입니다.
그 시절에는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습니다.
JBFK극회 회원들 (1939년)입니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우리말 방송만을 하게되고 지역에서도 자체방송을
해야 할필요성이 점차 늘어나면서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에
연주시설의 필요성을 느껴 1947년, 전주연주소를
설치하고 많은 프로금램을 전주에서 제작해서
유선으로 이리에 보내 방송했습니다.
6.25와 이리방송국
6.25때 이곳 방송과장이었던 성기석님의 말에 따르면
연희송신소가 철수한후 레코드음악으로 방송시간을 매꾸다가
7월 19일 공산군이 이리에 들어오기 전날 아침 방송을 중단하고
발진부(發振部)를 제거하여 수정편(水晶片)을 분리시킨다음
방공호 밑에 따로 따로 묻어놓고 철수했는데 이곳에 온 북한군이
이것을 찾아 방송시설을 갖추고 방송을 내 보내자 UN군의
폭격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해서 방송이 중단되어
방송은 하지못하고 있다가 공산군은 패퇴했습니다.
9.28수복당시 이리방송국은 청사 현관부분만
파손되었고 건물 여러곳에 기관포탄 자국만 남아있을뿐
방송시설은 전혀 피해가 없어 이리방송국은 그해
10월 5일부터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8년부터는 전주에 방송국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이리에 있던 방송국기능의 대부분이
전주로 옮겨갔고 1959년 4월 11일부터는 이름도 전주방송국으로
바뀌어 이리에는 송신기능만 남게 되어 이리송신소가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전주에 새로 마련된 방송국 청사모습입니다.
방송국 이전 행사를 마친 전성천 공보실장과
이규일 방송관리국장, 이춘성 전주방송국장을 비롯해서
그때 근무하시던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아래)
방송국이 전주로 옮기면서 방송은
더욱 활기를 띠고 전주방송국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루에 4시간 반의자체방송으로
지역주민과 호흡을 같이 했습니다.드라마, 공개방송,
합창, 어린이 방송극등 중앙방송국에서 하는
방송형태는 다 갖추었습니다.
1주일에 두 프로의 드라마를 제작하기위해
1957년 전주연주소에서 방송극회가 구성되고
구성원인 조인환, 최호영, 김종환, 김진욱, 김갑식,
박용운, 이봉섭님등은 작가이고 연출자였습니다.
성우로는 최선자, 정경수, 박길추, 이현,
고영은, 이종호, 문치상, 최동욱, 박난경님 등이 있었는데
최선자님은 서울에서 실화극장등에 출연해서 스타가 되었고
정경수님은 MBC아나운서로 진출했습니다. 효과를 보았던
옹상수님은 중앙방송국의 이름있는 효고요원으로
있다가 PD로바꾸어 방송을 했습니다.
지방방송국으로서는 처음 자체 제작했던
금요 연속극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주제곡은
국내 최고의 작곡가 손석우, 백영호 김강섬님등이 맡아 주셨고
주제곡 역시 송민도, 이미자, 김상희님등 당시의
정상급 가수가 불러 주셨습니다.
공개방송은 스무고개가 서울에서 한참 인기가
있었다지만 이곳에서는 자체 제작되어 방송 되었습니다.
유승국, 진기풍, 정재인, 김광수님 등의 패널이 참여해서
재미있게 끌고가던 방송이 생각납니다.
프로그램은 드라마나 공개방송외에도
마이크 가는대로, 라디오삼면경, 농민의차지,
노래와 경음악, 라디오께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작되어 방송되었습니다.
60년대 중반까지 전주방송국은 독점적인
지위를누리면서 지역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고
지역민들의사랑을 받아 왔지만 민영방송이 자리하면서
국영방송의 적은 예산과인원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또
70년대부터 TV방송시대가도래하면서 상대적으로
지역국의 위상이 약화되기는했어도 70년대
후반부터는 자체TV방송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서 더 얘기 하겠습니다.
이리 방송국은 근무자들에게 참 좋은 곳이었나 봅니다.
이인관님도 그러셨고 여기서 근무하시던 일본인들이 써 놓은
글에도 종종 이곳에서 근무 할 때가 좋았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초기 2년간 방송국장으로 근무했던 뱃쇼 요시히로(別所義傳)는 여기생활이
정말 즐거웠고 그야말로 낙원이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모두의
근로봉사로 테니스 코트를 만들어 여가시간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화재사건도 있었지만 큰일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뱃쇼 요시히로(別所義傳) -초대방송국장-
이리방송국 개국때부터 철거되기 직전까지의
사진을 한장에넣었습니다. 오른쪽 밑에 있는사진은
개국때의 청사모습이고왼쪽 밑그림은 철거 직전의 청사
모습입니다.위의 사진은 1947년의 청사 모습이고
오른쪽가운데는 방송실 모습입니다.
이리방송국 출입구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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